이명박 정부 이후 집권세력은 8월 15일을 광복절이 아니라 건국절로 기념하자고 주장한다. 1948년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도한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고 그 업적을 기리자고 말한다. 그런데, 조금만 생각하면 이게 왜 잘못된 주장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우선 우리 헌법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라고 명시돼있다. 당시 이승만조차도 임시정부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재건국이라는 말을 사용했다고 한다. 임시정부의 김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남북이 통일된 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남한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참여하지 않았다.
따라서, 1948년을 건국절로 삼는다는 것은 헌법정신에도 위배되며, 3.1운동 이후 국내외에서 항일투쟁을 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업적을 폄훼하는 일이다. 정부수립에만 참여했다면 친일파이건 나라를 팔아먹은 세력이든 과거는 다 덮어주고 건국의 업적을 기리자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그들 중에는 실제로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다가 해방의 혼란을 틈타 민첩하게 반공세력으로 둔갑한 이들도 있다. 특히 북한에서는 대부분의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처단했기 때문에 아마 통일정부가 수립되면 자신들의 생존이 위태로울 거라는 생각에 더 적극적으로 남한 단독 정부수립에 참여한 측면도 있을 거다.
우리나라 헌법에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물론, 우리의 해방이 외세의 힘에 의지한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민주주의가 해방과 동시에 미국에서 건너 온 것은 아니다. 조선말까지는 전제군주제였으며, 일제시대는 암흑의 시대였으니 민주공화국이라는 개념이 해방 이후 서구에서 들어오지 않았겠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결코 그렇지 않았다. 이미 19세기 후반에 조선에서도 홍영식, 박규수, 박영효, 김옥균 등 개화파들에 의해서 공화국이나 의회의 개념이 광범위하게 공유되고 있었고, 정부에서도 미국, 일본 등에 사절단 파견을 통해서 그들의 정치제도와 문물의 발전 상태를 충분히 알고 있었다.
고종과 보빙사절단으로 미국에서 돌아온 홍영식과의 대화 기록을 보면 조선의 왕인 고종도 이미 1883년에 민주제나 민주국가란 말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 종: 대통령의 임기는 얼마인가
홍영식: 4년에 한 번씩 교체됩니다.
고 종: 그때마다 조정의 관리도 바뀌나
홍영식: 그렇습니다. 대통령이 바뀔 때마다 행정부 관리가 바뀝니다.
고 종: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큰 폐단이 있을 텐데…
홍영식: 워싱턴이 나라를 세우 이래 100여 년이 지나도록 화폐 제도가 온전히 유지됩니다.
이 한가지 일만 보더라도 큰 폐단이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중략)
고 종: 민주제를 하는 나라는 우리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과 보통 사람 사이의 차별이 두드러지
않겠구나….현재 민주 제도를 실시하는 나라는 몇 나라나 되며, 유럽에도 민주국가가 있는
가
홍영식: 유럽에는 스위스, 프랑스 등의 나라가 있고, 남아메리카에는 멕시코와 페루, 칠레 등
모든 나라가 민주국입니다.
-홍영식, <복명문답기>
1919년 3.1운동에 이은 임시정부 수립이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의 탄생이라고 할 수 있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3.1운동은 농민, 학생, 지식인, 노동자 등 전 계층이 참여하여 전국적으로 일어난 운동이었다. 왕이 빼앗긴 나라를 민중의 힘으로 되찾기 위한 운동이었으며, 3.1운동에 참가한 민중의 열망과 의지를 바탕으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한 나라의 주권은 민족 고유의 것으로 침략자에게 넘겨질 수 없으며, 왕이 국권을 포기하였다면 인민이 그것을 이어받아 이제는 인민이 주인인 민주공화제 임시정부를 만들자는 인식이 공유되었다. 임시정부 헌장에는 국가의 주인이 더 이상 왕이 아니라 국민이며 국가는 국민의 자유와 평등, 권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천명하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조선의 마지막 왕인 고종에 관해서다. 흔히 비운의 왕으로 그려지는 일반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그는 권력욕의 화신이었고, 개인의 이익에만 눈이 먼 노회한 왕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1884년 갑신정변과 1894년 동학혁명 등으로 민중의 정치권력에 대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으나,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외세의 힘을 빌어서자기 백성을 도륙하도록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일신의 안위를 위해서 러시아 공관에 도망가는 왕을 어떻게 봐야 할까. 고종은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서 중추원을 의회형태로 운영하여 법률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아들였으나, 바로 그 다음날 독립협회 주요 지도자 17명을 구속하고 독립협회 해산을 명했다고 한다. 백성과의 약속마저도 하루 아침에 깨버리는 고종을 두고 윤치호는 이렇게 말했단다.
“이 사람이 황제라니! 거짓말을 능사로 하는 배신적인 어떤 비겁자라도 대한의 대황제보다 더 천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고종은 자신의 권력을 민중과 나누고자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일제에게 권력을 넘겨줄 때까지도 자신을 황제로 칭하고 모든 권력을 놓지 않았다. 모든 것을 자기 뜻대로 하고, 다른 의견을 가진 자는 모두 내쫓았는데 일이 잘못되었다면 누구의 책임인가? 권력은 한 사람에게 있었는데 책임은 국민이 다 져야 하는가? 나라를 빼앗겼으면 고종과 그 세력은 자결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이 과한 말은 아닐 거다. 당사자인 고종을 비롯한 왕족과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은 일본으로부터 작위도 받고 든든한 경제적 보상도 받았으니, 조선 오백년 역사상 가장 찌질한 왕을 꼽으라면 과거에는 선조를 으뜸으로 쳤으나, 고종도 이에 못지 않아 보인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지만, 해방 이후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되지 않고 좌파우파가 협력하여 통일정부를 구성했다면 우리는 어떤 나라를 만들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방 당시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세력이 우세했기 때문에 아마도 통일정부는 공산국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남한 정부가 친일반민족 행위자를 처단하지 못하고 친일파들에 의해 장악된 측면에서 국가적 정통성은 부족하지만, 반면에 북한처럼 가난한 독재국가가 되지 않은 것은 이승만과 그 세력의 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일제시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대부분 민주주의자였다. 이들은 독립을 최우선 목표로 두고 독립한 후에도 선거를 통해 민주공화국을 구성하겠다고 말했으니 말이다. 해방 이후 보수우파 정치인들도 경제, 교육, 정치의 균등에 동의한 민주주의자였다. 그들이 만든 제헌헌법에 그 정신이 잘 드러나 있다. 지금의 북한은 사회주의 혹은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전체주의 독재국가이다. 민주주의 국가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이라는 두 날개로 난다. 극한대립을 빚었던 좌파와 우파의 독립운동가 김구, 이승만, 여운형, 김규식, 박헌영 등이 좌우의 한 축을 담당하여 통일조국을 만들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유럽의 사민주의 복지국가의 형태를 띈 국가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 전쟁의 위협도, 수십만의 군대도 없는, 그 비용과 에너지를 국민의 복지에 투자하는 나라가 되지 않았을까
19세기 말에서 정부 수립까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를 찾아서
대한민국은 1948년에 건국되었고, 한국인은 해방 이후에야 민주주의를 알았고, 한국 민주주의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그대로 받아들인 것일까? 이 책은 역사적 사료와 인물들의 행적, 실천을 바탕으로 한국 민주주의에 대한 이러한 통념을 뒤집는다. 건국절 논란, 역사교과서를 둘러싼 갈등 등으로 우리 사회에서는 지속적으로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라는 질문이 나오고 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역사 속에서 만들어진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헌법 제1조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본 저자는 대한, 민국, 민주, 공화국이란 단어가 등장하는 과정과 그 뜻을 살피고, 1850년대부터 대한민국 정부가 공식 출범한 1948년까지의 역사에서 우리 민주주의의 뿌리를 찾고 있다.
보빙사절단으로 세계를 둘러본 홍영식과 고종의 민주정체에 대한 대화에서 시작해 1948년 제헌헌법의 의미까지 짚어 보는 이 책은 우리 민주주의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역사 속에서 실천하고 싸우며 만든 민주공화국의 살아 있는 의미는 무엇인지 생생하게 전달한다.
머리말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프롤로그 대한민국사 여행을 시작하며
1. 고종이 홍영식과 대통령제에 대해 토론하다 - 민주주의란 말을 언제 처음 알았을까?
미국에는 대통령이 있다 / 세상에는 여러 나라가 있다 / 최한기, 민주정치를 발견하다 / 임금과 백성의 권리가 같다니! / 구미입헌정체
2. 최초의 민주주의자를 찾아서 - 민주주의 실천의 기원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실패한 쿠데타 / 입헌 정체를 탐색하다 / 최초의 민주주의자는…… / 민중적 지식인 전봉준 / 인민 자치를 실험하다 / 왕은 있으나 왕권은 없다 / 민주를 적대한 자유, 갑오개혁이 비극적 종결
3. 의회와 헌법을 상상하다 - 민주 정치의 제도화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1896년 조선, 공론의 장이 열리다 / 왕권과 민권, 주권은 누구에게 있나? / 중추원을 의회처럼 고쳐 운영하자 / 나를 체포하라 / 황제의 대반격, 그리고 대한국 국제 / 그런데, 왜……
4. 군주제에서 민주공화제로 - 민주공화제를 우리 것으로 삼은 때는 언제였을까?
구한국이 사라짐을 슬퍼하고, 신한국 건설을 축원한다 / 새로운 대한을 상상하다 / 고종에게 망국의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요? / 공화 만세! 민국을 상상하다 / 대동단결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자
5. 3·1운동, 마침내 대한민국이 탄생하다 - 대한민국은 언제, 어떻게 탄생하였을까?
주권민유를 선언한 3ㆍ1운동 / 대한독립만세, 공화만세! / 대한민국을 수립하다 / 헌법의 아버지 조소앙, 민주공화국의 시대를 열다
6. 혁명의 시대, 자유와 평등을 양 날개로 삼아 - 우리가 이해한 민주주의는 무엇이었을까?
‘혁명의 시대’ / 민주주의를 상상하다 / 동아일보 ……,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 민주주의의 두 날개 : 정치적 자유와 사회적 평등 / 치안유지법, 민주주의의 왼쪽 날개를 자르다
7. 민주공화국, 식민지 너머의 꿈 - 독립운동가들은 어떤 국가를 상상하였을까?
나라가 없다는 것 / 문제는 식민지 자본주의, 대안은 민주주의 / 독립을 꿈꾼다는 것은? / 균등 사회를 꿈꾸다 / 건국 강령 - 대한민국의 설계도를 만들다
8. 선거를 통해 민주공화국을 세우자 - 해방, 국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암흑의 세월? / 그날이 오면…… / 결정적 시기 무장봉기 로 독립을 쟁취하자! / 미국과 소련, 그리고 대한민국 / 1945년 8월 15일 / 선거를 통해 민주공화국을 세우자
9. 남과 북, 분단으로 치닫다 - 분단의 원인은 무엇이며 정녕 피할 수는 없었을까?
돌아온 이승만 /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조선인민공화국 / 모스크바 3상 회의…… / 신탁통치 반대냐 임시정부 수립이냐 / 합작인가 단독정부인가 - 38선 이북의 선택 / 민주의원과 민전, 그리고 미군정 / 미소공동위원회, 통일임시정부 수립을 가늠하다 / 분단을 피할 수는 없었을까?
10.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대한민국 헌법에는 어떤 이야기가 아로새겨져 있을까?
분단으로 치닫다 / 두 개의 헌법 초안 / 두 개의 선거법, 그리고 첫 선거 / 헌법을 만들다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에필로그 1948년,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
부록 대한민국 헌법(1948.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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