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읽을 시간이 없다고 하소연하던 내게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라고 조언을 한 절친이 있었다. 국문과를 나와 극본을 쓰던 친구는 책과 글이 일상이었고 결혼과 육아에 늘 혼을 빼놓고 살던 나는 투정이 일상이었다. 서서히 우울감에 젖어들어 하소연을 늘어놓던 내게 친구는 자투리 시간을 활용해서 독서할 것을 권했다. 취향을 몰랐음에도 읽을만한 책을 골라주며도 도움을 주었다. 그때 들였던 책이 바로 곽아람 작가의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였다. 십 년 전이라서 친구의 추천이었는지 아니면 제목에 이끌려 구입한 건지 선뜻 기억이 나지 않지만 책장 아래 칸을 지키고 있던 이 책을 꺼내든 것도 다시 만날 때가 되었나 보다. 하지만 몇 장을 넘겼는데도 도무지 읽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 내가 읽었던 책이 많지 않았기에 아마도 이곳에 소개된 책들이 죄다 낯설어 그랬을 것이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다가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와 짝을 이루고 있던 [아무도 기다려 주지 않는다]의 그림을 본 순간 내가 이 책을 읽은 기억이 떠올랐다.수용소의 하루에 대한 소설도 흥미로웠지만 그림 속 남자의 당황한 눈빛과 가족들의 몸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깃든 표정들에 묘한 감정을 느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나 그 부분을 제외하곤 죄다 기억이 없어 새롭게 다시 읽어내려갔다.
그림과 함께 책 읽기세상에는 여러 방식의 책읽기가 가능하다. 단순히 책만 읽을 수도 있고 책과 책을 읽을 수도 있다. 크리스테바가 말한 상호텍스트성이 그러한 방식이다. 전혀 다른 매체와 함께 책을 읽을 수도 있다. 음악과 책, 이런 식으로 말이다. 이 책은 책과 그림의 만남이다. 고고미술사학을 전공한 저자는 그림에도 일가견이 있어 자신의 독서 여정을 그림과 엮고 있다. 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에서 저자는 감명 깊게 읽은 책 속의 인상적인 장면을 이에 맞는 그림과 엮으면서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저자는 다양한 텍스트와 회화를 넘나든다. 1장에서는 박경리와 황순원과 같은 한국의 대표작가를 다룬다. 2장에서는 위대한 개츠비 를 위시한 세계문학이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기술된다. 3장은 카프카와 루쉰 등의 작품이 등장하고 마지막 4장은 어린 왕자 와 같이 어린 시절 누구나 한 번쯤 읽었음직한 책이 소개된다. 독자는 이 책을 통해 이름난 문학 작품과 더불어 회화까지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Ⅰ여기, 당신과 나의 삶을 펼치다
: 여자는 세상을 원망하지 않고 죽었다
박경리, 토지 | 이유태, 「탐구」
: 스스로 일찍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
오정희, 「중국인 거리」 | 이인성, 「애향」
: 그가 사랑한 것은 예술이 아니라 바로 사는 일이었다
박완서, 나목 | 박수근, 「나무와 두 여인」
: 외로운 사람은 편지를 쓴다
김승옥, 「무진기행」 | 얀 베르메르, 「편지를 읽고 있는 푸른 옷의 여인」
: 내가 처음 너를 만났을 때 너는 작은 소녀였고 머리엔 제비꽃
황순원, 「소나기」 | 존 싱어 사전트, 「바이올렛 사전트」
: 거룩한 아름다움, 영원의 얼굴을 찾아서
최인훈, 「가면고」 | 에드가 드가, 「스타」
Ⅱ 사랑, 아름답고 처연하다
: 한 여자에게 바쳐진 한 남자의 핑크 빛 심장
F. 스콧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 귀스타브 카유보트, 「창가의 남자」
: 당신의 그녀에게서 낯선 우아함과 신비로움을 만난다면
제임스 조이스, 「죽은 자들」 | 귀스타브 쿠르베, 「조, 아름다운 아일랜드 여인」
: 살아남은 자가 아름답다
마거릿 미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 제임스 티소, 「과부」
: 신성한 인간의 마음을 따랐을 뿐
너대니얼 호손, 주홍 글자 | 조르주 드 라 투르, 「참회하는 막달라마리아」
: 싸늘하게 식어가는 당신에게 ‘안녕’
윌리엄 포크너, 「에밀리를 위한 장미」 | 아서 휴스, 「그건 피에몬테 사람이었네」
: 똑똑하고 능력 있는 그녀들의 로망
제인 오스틴, 오만과 편견 | 메리 커샛, 「자화상」
: 둘이서 나란히 걷기에는 너무나 좁은 길
앙드레 지드, 좁은 문 | 프란츠 아이블, 「책 읽는 소녀」
: 사랑에 미친 여자, 사랑에 배반당한 여자
샬럿 브론테, 제인 에어 | 제임스 맥닐 휘슬러, 「흰색의 심포니 No.1―흰 옷의 소녀」
Ⅲ 인간, 더 인간다움을 고뇌하다
: 당신의 데미안과 마주한 적이 있나요
헤르만 헤세, 데미안 | 페르낭 크노프, 「침묵」
: 인간은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를 사랑하지 않는다
프란츠 카프카, 「변신」 | 르네 마그리트, 「생존의 기술」
: 그리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일랴 레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 차라리 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허먼 멜빌, 「바틀비」 | 에드워드 호퍼, 「소도시의 사무실」
: 예술이란, 위험한 칼춤을 민첩하게 추어내는 것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 카스파르 다비트 프리드리히, 「안개 낀 바다를 바라보는 나그네」
: 희망 역시 내가 만든 우상이 아니던가
루쉰, 「고향」 | 장욱진, 「자화상」
: 아름다움이란 충치와 같아, 아프게 하여 존재를 주장하는 것
미시마 유키오, 금각사 | 우타가와 히로시게, 「아사쿠사의 논과 도리노마치의 참배」
: 한 줄기 빛이 비스듬히
다자이 오사무, 「사양」 | 에드바르트 뭉크, 「봄」
: 아무래도 묘한 얼굴이군, 꽤나 지친 세기말적 얼굴
나쓰메 소세키, 산시로 | 기시다 류세이, 「다카쓰 고우치 군의 초상」
Ⅳ 소녀, 책을 추억하다
: 이 소녀를 나는 마음을 다해 사랑했네
루시 모드 몽고메리, 빨강머리 앤 | 노먼 록웰, 「눈에 멍이 든 소녀」
: 창피해서 술을 마실 때의 당신에게
앙투안 마리 로제 드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
헤라르트 테르보르흐, 「편지를 든 채 술을 마시는 여인」
: 7년을 갈고닦아, 거침없이 하이킥!
알퐁스 도데, 「교황의 노새」 |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조, 「성 바울의 개종」
: 조그만 시골 마을에서도 살인은 벌어진다
애거사 크리스티, 열세 가지 수수께끼 | 안나 도로테아 테르부슈, 「자화상」
: 달님이 내게 들려준 이야기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그림 없는 그림책 | 마르크 샤갈, 「달로 가는 화가」
: 신성이란 원래 낮은 곳으로 임하는 것
루머 고든, 「부엌의 마리아님」 | 콘스탄티노플 화파, 「블라디미르의 성모」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빈센트 반 고흐, 「별이 빛나는 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