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예술극장서울에서 처음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명동에 대한투자금융이라는 금융회사가 있었다. 나는 내가 다니던 회사가 발행한 융통어음을 그때 용어로는 와리(わり), 즉 할인(割引)해서 자금을 차입해오는 용무로대한투자금융 건물에 출입을 했는데 그 건물은 당시 명동 주변에 흔했던 개발독재시대에 대충 지어 올린 철골 콘크리트 건물들과는 사뭇 다른 고풍스러운 멋을 풍기고 있었다. 당시 투금으로 불리던 투자금융회사들은 급여를 쎄게 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어서 나처럼 상경계를 전공한 대학 졸업자들에게는 취업하고 싶은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 고풍스러운 건물을 사무실로 쓰던 ‘대투’의 거래 창구마저 근사하게 보이던 기억이 생생하다. 부러웠으리라. 다른 한편 대투 건물에 출입할 때마다 나는 이 멋진 건물이 곧 사라질 것 같다는 아쉬운 감정을 느끼곤 했다. 아마 그것은 건물 자체로는 멋있으나주변의 건물들과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 이를테면 이 건물 역시 주변 건물과 평준화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예감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한다. 내 그 어설픈 예감과는 별개로, 부도가 날 것을 알고 융통어음을 찍어 돈을 빌리던 기업들과, 부도가 날 것이라는 것을 알고그 어음을 할인하여 돈을 빌려 주던 투자금융회사들은 IMF시대에 세트로 정말 부도가 나버렸으며 그 바람에 나도 직장을 옮긴 후 더 이상 명동 출입을 하지 않게 되었다.그런데 그로부터 25년 세월을 넘어, 최근 『경성의 건축가들』이라는 책을 읽다가 25년 전 내가 사라질 것 같다는 예감을 하며 출입하던 대투 건물의 사연과 행방을 알게 되었다. 그 건물은 일제시대인 1937년 다마타 기쓰지(玉田橘治)라는 일본인 건축가의 설계로 당시 일본인이 많이 거주하던 명동에 메이지자(明治座)라는 극장 건물로 세워졌다 한다. 해방 후 건물은 서울시 등으로 소유권이 이전되며 국립극장으로 사용되다가 1975년 대투가 인수하여 사무실 건물로 사용하였으며 1997년 IMF 시절 대투의 도산으로 헐릴 위기에 처하자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건물의 역사성을 알아보고 보존 운동을 벌여 2004년 문화관광부가 건물을 매입, 복원 공사를 거쳐 2009년에 국립극단 소속 명동예술극장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다고 한다. 25년전 내 예감의 반은 맞았고 반은 틀렸던 셈이다. 책 『경성의 건축가들』들은 일제시대와 해방 후 우리 땅에서 활동한 건축가와 건축업계 인물들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책이다. 저자 김소연이 머리말에 밝히기로 책을 처음 기획할 때 주변 반응이 거기 “뭐 볼 게 있다고!”였다 하며 YES24의 추천에 혹 하여 책을 구매한 나조차도 충동구매를 한 것이겠거니, 그래 뭐 볼 게 있겠냐 이왕 산 책이니 볼 거 없다는 것을 확인이라도 해보자 펼친 책인데 거의 단숨에 다 읽었다. 현재의 우리는 역사라는 시간과 한반도라는 공간의 토대 위에 오늘을 살고 있다. 『경성의 건축가들』은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많은 고민과 과제들의 시공간적 기원을 찾는 작업의 일부라는 점에서 - 때로 ‘일그러진 시대’ 운운하는 오바가 살짝 거슬린다는 점만 빼면 - 확실히 볼 게 있는 책이었다.
경성을 사랑한 건축가들, 그들이 남긴 또다른 이야기
대한민국 건축 1세대들의 자취를 따라서
암살, 밀정, 경성 스캔들, 모던보이 같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시대극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배경이 있다. 바로 근대건축이다. 일본은 죽도록 싫어하면서도 미쓰코시백화점 앞에서는 입이 딱 벌어졌던 사람들, 암울한 현실을 비관하면서도 경성역에서 들려오는 문명의 소리에 들떴던 사람들, 카페와 살롱에서 벌겋게 상기된 얼굴로 서구를 동경했던 민족주의자들…. 이들에게 식민지의 근대건축은 이상과 현실, 이성과 감성의 불협화음이 요동치던 장소였다.
경성의 건축가들 은 일제가 세운 학교에서 건축을 배우고 건축가로 성장했던 일제강점기 조선인 건축가들과 비주류 외국인 건축가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수탈을 위해 만들어지는 건축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개인적 이상 사이에서 이들은 어떤 길을 택했을까? 이 책을 통해 대한민국 건축 1세대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유산을 오롯이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그나마 자료가 있어 이야깃거리를 남긴 사람들이다. 자료가 없어서 아예 잊힌 사람도 많다. 지은이 김소연은 시대를 풍미했던 혹은 그러지 못하고 안타깝게 저물었던 이들의 삶과 그들이 남긴 건축물이라는 유산을 이제 한번쯤 되돌아볼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아울러 그들을 통해 그 시대의 또다른 이야기들을 알게 된다면, 개발에 대한 관점과 건물의 보존 방식 그리고 언젠가 역사가 될 이 시대 건축가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조금은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는다.
들어가는 말
1장 탄생과 성장, 경성고등공업학교와 조선총독부
2장 최초이자 최고 건축가의 이면, 박길룡
3장 불꽃 대신 선택한 건축, 박동진
4장 국립묘지의 애국지사, 강윤
5장 디아스포라의 섬, 박인준
6장 건축구조의 달인, 김세연
7장 장관직만 다섯 번, 김윤기
8장 만주국으로 간 수재, 이천승
9장 시인 이전에 건축가, 이상 혹은 김해경
10장 우리말 건축용어를 찾아서, 장기인
11장 동학 교주가 왜? 나카무라 요시헤이
12장 식민지 조선에서 인생 역전을, 다마타 기쓰지와 오스미 야지로
13장 한 알의 겨자씨, 윌리엄 보리스
14장 틈새시장 속으로, 전통건축 장인의 변신
15장 청년 건축가의 반격, 청와와 젊은 그들
나가는 말/주/사진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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