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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좋아

아껴 읽고 싶은 책을 가끔 만나게 된다. 모처럼 만난 흥미진진한 장편 소설이 중반부를 지나 어느덧 후반부 페이지에 접어들게 되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되지 않나. 아, 조금만 더 길게 이 이야기가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 60대 할머니 작가의 에세이가 뭐 그렇게 흥미진진할 리는 없는데, 페이지 한장 한장 넘기기가 아깝다. 애고, 쿨한 척 해도 얘기 하시는거 들어보면 역시 할머니야 할머니, 싶다가도 어느 순간 살짝 슥 비틀어 얘기를 마무리 짓는 걸 보면 예삿 분은 아니다 싶다. 이 할머니 작가는 이 책이 나온 즈음에 유방암 진단을 받았고 그로부터 6년 후에 눈을 감았다.그래서일까. 글꼭지마다 얘깃거리는 제각각이지만 항상 그 배경에는 치매에 걸린 엄마와 노인이 된 자신이 자리잡고 있다. 생의 마지막 페이지에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는 시간, 자신의 마음과, 오늘 만난 이웃들과, 창 밖 자연과, 작가는 담담하게 따뜻하게 소통하고 있다. 햇볕 따스한 날의 Rainy Jazz. 혹은 비오는 날의 Shiny Smile.거울을 보고 "거짓말, 이게 나야?"하고 흠칫하는 순간을 제외하고, 혼자 있을 때 나는 도대체 몇 살일까. 푸른 하늘에 하얀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면 세계는 어릴 때와 다름없이 나와 함께 있다. 예순 살이든 네 살이든 내 가 하늘을 보고 있을 뿐이다.일흔일곱 살의 어머니를 유럽여행에 데려간 적이 있었다. 스위스의 융프라우 산자락, 하이디가 뛰어놀았을 것 같은 마을을 내려다보며 어머니가 "여기서 죽어도 좋아"라고 기뻐했을 때,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져 어머니에게 명중해서 절명했다면, 어머니는 행복한 채로 천국에 갈 수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는 일이 때때로 있다.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살고 있다. 사는 동안은 살아가는 것 말고는 달리 없다. 산다는 건 뭐냐. 그래, 내일 아라이 씨네로 커다란 머위 뿌리를 나눠받으러 가는 거다. 그래서 내년에 커다란 머위가 싹을 낼지 안 낼지 걱정하는 거다. 그리고 조금 큰 어린 꽃대가 나오면 기뻐하는 거다. 언제 죽어도 좋다. 하지만 오늘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사노 요코의 귀거래, 기타가루이자와 일기사노 요코는 60세 무렵부터 번잡한 도쿄를 떠나 일본 최초의 컬러 영화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의 촬영지인 군마 현의 산촌에서 생활했다. ‘대학촌’이라고 불리는 기타가루이자와에서의 약 5년간의 전원생활을 주로 다룬 연작 에세이집이 바로 어쩌면 좋아 이다. 어쩌면 좋아 는 기타가루이자와 지역 별장에 사는 사람들을 비롯해 지역 토박이들과의 교류를 그린 ‘커뮤니티 문학’이라 할 수 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사노 요코처럼 60세 이상이므로 ‘초로初老 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좋아 는 일본 근대 문예 평론의 창시자라는 고바야시 히데오의 이름을 딴 상을 수상한 작품으로 사노 요코의 삶에 대한 유쾌하면서도 가슴 먹먹하게 하는 통찰이 잘 녹아 있는 연작 에세이집이다. 사노 요코의 에세이답게 전체적으로 밝음을 기조로 하고 있으면서도 상실과 애수의 터치가 곳곳에 섞여 있다. 유머를 잃지 않는 사노 요코의 에세이들 속에는 그녀가 툭툭 던져놓은 죽음에 대한 단상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죽음과 노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는데도 그 분위기는 전혀 어둡지 않다. 오히려 하나하나가 다 재미있다. 그리고 재미 뒤에는 한 편의 이야기를 읽은 뒤 책을 잠시 덮고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독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일본의 한 후배 작가가 표현했듯이 이건, 오직 사노 요코만이 할 수 있는 기예다.

이것은 사기?
고맙다
오늘이 아니라도 좋아
무지개를 바라보며 죽는다
목소리는 배에서부터 내라
예사롭게 죽다
그런 거야?
그건, 그건 말이지요
그렇다면 괜찮지만
헛간, 헛간
보통이 아니야
어쩌면 좋아
아무것도 몰랐다
산의 백화점 호소카와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토끼
수수께끼의 인물 하야시 씨
돈으로 산다
후기를 대신하여

옮긴이의 말